세계여행

크레타섬 헤라클리온 여행(크노소스 궁전, 카잔차키스 무덤)

한솔마을 2020. 8. 25. 12:38
728x90
반응형

 

 

이동경로(6. 26)

하니아에서 헤라클리온으로 이동하는 날이다. 하니아에서 헤라클리온으로 이동하는 방법에는 대표적으로 버스가 있다. 사실 버스밖에 대안이 없다고 보면 된다. 렌트카를 빌리지 않는 한..

 

오전 9시에 하니아 버스터미널에서 헤라클리온으로 가는 버스가 있었다. 비용은 11유로가 조금 넘었던 걸로 기억한다.

 

소요시간은 4시간 남짓.

 

 

 

헤라클리온은 미코노스 궁이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꼬불꼬불 해안도로를 따라 이동하는데 경치가 볼만하다.

 

 

버스를 타고 하니아에서 크레타로 이동하는 중에 보이는 풍경은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헤라클리온에 도착해서 호텔에 체크인하고 늦은 점심을 먹었다. 분수대가 설치된 광장을 중심으로 카페와 레스토랑이 줄지어 있었다.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카잔차키스의 무덤이다. 호텔에서 걸어가도 멀지 않은 거리였다.

 

카잔차키스는 그리스의 시인이자 소설가, 극작가이다.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역사상 위인을 주제로 한 비극을 많이 썼다. 그리스 난민의 고통을 묘사한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는 그리스도>로 세계적인 명성을 었었고, 대표작으로는 <그리스인 조르바>, <오디세이아> 등이 있다.

카잔차키스는 1883년 출생으로 그리스 크레타섬의 헤라클리온 출신이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글을 쓴 그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와 잠들어 있었다.

 

 

 

구글맵을 따라 걷다 보면 도시를 둘러싼 성벽을 만나게 된다. 그 옛날 헤라클리온을 수비하는 성벽이었다는데 자세한건 기억이...

 

 

 

아무튼 성벽위로 올라가면 카잔차키스 무덤을 만날 수 있다.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카잔차키스가 생각하는 "자유"였을까?

 

카잔챠키스의 묘는 그의 작품 <최후의 유혹> 때문에 그리스정교회와 로마카톨릭으로부터 파문을 당했기 때문에 공동묘지에 묻히지 못하고 성벽위에 있다고 한다. 바람부는 성벽위에 묘비의 글처럼 그는 아마도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있을 것이다.

 

사실 그 전 까지는 카잔차키스라는 인물에 대해 전혀 들어본 적도 없었으나, 알고 보니 대단한 작가였으며 공공복지부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고 한다.

 

노벨 문학상 후보로 2번이나 지명되었으나 수상의 영예는 안지 못하였지만, 톨이토이와 도스예프스키와 비견될 정도라고 하니 시간나면 책을 읽어 봐야겠다.

 

 

어쨌거나 위대한 그리스인 중 한명으로 추앙 받는 그는 대표작 "그리스인 조르바"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크레타섬에 안치 되었다.

그는 영원히 에게해와 해라클리온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의 묘지 한편에는 두번째 아내의 묘가 함께 있다)

 

 

 

 

 

카잔차키스의 묘에서 크노소스 궁을 찾아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주변 상인들에게 크노소스라고 물으면 버스 정류장을 알려주기 때문.

 

크노소스 궁을 가는 버스는 하나밖에 없다.

오랜 기억을 더듬자면 블루라인 2번 버스다..

 

 

버스를 타고 가다보면 사람들이 다함께 우르르 하차하는 정류장이 있다. 그 곳이 바로 크노소스 궁이다.

 

 

그리스 문명이 유럽의 뿌리라면, 미노스 문명은 그리스 문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다. 미노스 문명은 미노아 문명 또는 크레타 문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미노스 문명"은 이 유적을 발견한 아담스라는 자에 의해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미노스"는 이 지역에서 전해내려오는 전설의 황소를 뜻하는데, 크노소스 궁이 그 황소를 가두었던 미궁이었다는 그리스 신화는 다들 한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고대 크레타섬 사람들은 지리적 이점과 해상무역을 통해 번영을 누렸으며, 이로 인해 문명발전의 기틀을 닦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의 건축과 생활양식이 본토로 전해지면서 그리스 문명이 꽃피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하지만 정작 크노소스 궁은 훼손이 심하고, 현재까지도 복원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지하 공간에는 출입조차 할 수 없었다

 

 

 

'크노소스궁은 생각보다 볼게 없다.' 라는 인식이 대부분이지만, 서양 역사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중요한 장소다.

고대 오리엔트 문명의 전체주의적 사상과는 대조적으로 개인적인 느낌이 물씬난다. 각각의 공간은 정돈되지 않고 개별적인 기호와 개성으로 만들어졌고, 이 것이 전체를 구성하게 되면서 마치 미로처럼 형성되었다.

 

미노아문명은 전쟁보다는 교역과 교류를 문명의 근간으로 삼았기 때문에 소모적인 파괴없이 문명창출에 집중할 수 있었다고 한다. 크레타의 지도자는 전제군주나 사령관이 아닌 경제적 조정자에 가까웠고, 자유로운 개인주의를 표방하여 고루 잘 사는 평등한 사회였다고 한다. 거기에 더해 놀이 문화가 발달했으나, 현재까지 남아있는 무덤, 성채, 신전 등 고대 기념비적인 건축은 거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크노소스 궁전은 고대 오리엔트 대륙의 전체주의 건축에서 그리스 반도의 서양 개인주의 건축으로 넘어가는 전환기적 특징 잘 나타나 있다. 건축약식 자체는 이집트의 초기 신전과 아시리아 왕궁의 연속적인 구성을 따른다.

 

 

중앙에 큰 마당이 중심을 잡고 중간에 부분적으로 복도가 생성되나, 뚜렷한 대칭과 축은 찾기 힘들다. 수백개의 방 또한 크기나 형태가 같은 것이 없으며, 그 내부 또한 제각각이기에 개인주의를 표방한 사회임을 짐작할 수 있다.

 

미노스 문명을 제대로 보고 배우고 싶다면 헤라클리온 시내에 있는 박물관에서 그들의 유물을 만나 볼 수 있다.

 

반응형